마음의 눈
파릇파릇하던 학창시절,
장자나 선(禪)에 푹 빠져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어린 왕자나 꽃들에게 희망을 그리고, The Missing Piece 등에 매료되면서,
마음의 눈,
즉, 심안(心眼)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돌연히 글로 정리하고 싶어서 저의 생각을 이렇게 올려봅니다.
예전에 어떤 회사에서 아래와 같은 입사시험을 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아래 문제를 읽고 스스로의 답을 생각해 보세요.
폭풍우가 거칠게 몰아치는 어두운 한밤중에
차를 몰고 가다 버스정류장을 지나가게 되었다.
버스정류장에는 세 사람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1. 곧 죽을 것처럼 보이는 할머니
2. 언젠가 당신의 생명을 구해준 오래된 친구
3. 항상 꿈꾸어 온 완벽한 미모의 여자
당신은 단 한 사람만 차에 태울 수 있다. 누구를 태워주겠는가?.
어떤 응시자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친구에게 키를 주어 할머니를 병원으로 모셔가도록 부탁하겠습니다."
같은 사물을 보고 있을 뿐인데도,
어떤 이들은 다른 이들이 상상하지 못한 것들을 끄집어 냅니다.
이러한 능력은 과연 훈련으로 얻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원래부터 타고난 능력일까요?
학창시절 마음의 눈을 뜨기 위해서 책도 읽고,
무작정 길을 떠나보기도 하고,
많은 시간, 생각에 잠겨서 고민을 하곤 했었습니다.
조금 더 가보면 하늘이 보이려나
그리움을 가슴 깊이 눌러 두고 온
내 고향이 그립다.
조금 더 올라가면 하늘에 오르려나
마음은 허공에 있는 데
내 몸이 너무도 무겁다.
애야, 육신이 너무 무겁구나
이곳에 두고 가자
내동댕이쳐지는 저 껍질 ...
미련이련 가, 이 고통은 ?
조금 더 가보면 하늘이 보이려나
조금 더 올라가면 하늘에 오르려나
무거운 육신, 숨가쁜 피로
어쩌면,
잘 못 왔는지도 몰라.
- 학창시절 어느 날 쓴 낙서
그리고,
스스로의 해답을 찾게 됩니다.
당연히 심안은 훈련할 수 있으며,
대상을 인지하는 태도의 문제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심안이란 인지 과정에 때를 묻히는 것이다."
이것이 제가 내린 결론이었습니다.
육안은 정직합니다. 본대로 인식합니다.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철학을 덧씌워서,
다른 이나 자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때,
저는 그것을 "마음의 눈을 떴다"라고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인지 심안은 순수해야 한다는
고정 관념을 가져버렸기 때문에 심안을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이 없는 사물에서 생명을 찾아 내려 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 없는 사물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이 심안이다."
그렇습니다.
마음의 눈을 뜨게 되면,
그저 발 길에 치어 돌아다니는 돌멩이 하나에도 생명을 불어 넣어,
남들이 볼 수 없는 의미를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게 되는 것 입니다.
인지의 과정을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의 뇌는 크게 3개의 개념적인 층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가장 원초적인 단계는 모든 동물들이 공유하고 있는 인식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운동과 같이 입력이 바로 결과로 나타내는 과정에 관여합니다.
이보다 더 고차원적인 단계는 주로 본초적인 감정을 관장하는 곳 입니다.
파충류의 뇌라고도 하는 이 부분은 원초적인 반응을 한 번 더 처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감정상태에 따라서 같은 자극에도 다르게 행동하게 만듭니다.
다음 단계는 포유류만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좀 더 복잡한 감정을 가지게 합니다.
나아가서는 인간처럼 자아의식을 갖도록 하는 곳 입니다.
참고적으로,
과학자들은 사랑은 포유류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뇌의 구조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외부의 자극을 받으면,
세 가지의 단계를 거쳐 그것을 인지하게 되는 것 입니다.
이때,
각 단계를 거칠 수록 판단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필요하게 됩니다.
판단하는데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는 것은,
뇌에게 많은 부하를 주는 일 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계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도태되었을 겁니다.
따라서,
뇌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이미 많은 반복 훈련한 내용은 특별한 의식 없이 직관에 의해서 결정하게 됩니다.
좀 더 효율적으로 뇌를 사용하기 위한 진화의 결과 입니다.
글의 주제와 약간 벗어나는 이야기를 했는데,
중요한 것은 사람은 최대 세 가지의 단계를 통해서 인지를 완성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음의 눈을 뜨고 무엇인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파악하는 데는
당연히 노력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상층부의 뇌를 충분히 괴롭혀야 한다는 겁니다.
생각이 없는 또는 생각의 그릇이 작은 사람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상층부의 뇌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즉각적이고 원초적인 프로세스에 의존하여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이러한 부류들은 쉽게 화를 내고, 쉽게 잊으며, 쉽게 들뜨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호탕"하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마음의 문을 열고 사물을 바라볼 여유 따위는 가질 수가 없습니다.
물론 언제나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한정된 뇌의 능력으로 현실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들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몸에 독화살을 맞아 매우 괴로워하고 있다고 하자.
이것을 안타깝게 여긴 친족들이 그 사람의 괴로움을 없애주기 위하여
화살을 뽑을 의사를 구해 의사가 화살을 뽑으려 하는데
이 사람이
“아직은 화살을 뽑을 수 없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의 성과 이름과 모습 등을 알아야겠다.
나는 먼저 나를 쏜 활이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알아야겠다”
라고 하면서 화살 뽑기를 거부한다면
이 사람은 결국 그것을 알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심안을 얻기 위해서는,
뇌를 타이르고 길들여야 합니다.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뇌는 효율성을 유지하기 위해 웬만해서는 적게 일하려고 노력합니다.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이나 몰입 상태가 아니라면 머리 쓰는 것을 회피합니다.
그래서 공부가 그렇게 어려운 가 봅니다.
벼락치기가 지속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뇌는 지속적으로 일하기를 거부하고
마음의 눈을 뜰 수 없도록 방해합니다.
마음의 눈을 뜬 사람들의 비결은 무엇인가 대상을 좋아하는 것 입니다.
물질적인 대상뿐 아니라 개념적인 대상과 사랑에 빠지는 것 입니다.
농부가 힘들게 농사를 짓고, 그 결실의 즐거움에 맛보게 되어,
그 다음 해에도 힘들게 땀을 흘리면서도 즐거운 웃음을 지을 수 있듯이,
심안의 안목으로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대상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 새로운 결실을 맛 본 사람들은
사물을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 입니다.
"얼음이 녹으면 무엇이 되나요?"
"봄이요, 얼음이 녹으면 봄이 와요."